4. 중국 위진수당시대: 호한의 충돌과 융합 & 중국의 불교


Ⅳ. 중국 위진수당(魏晋隋唐)시대: 호한(胡漢)의 충돌과 융합


 중국 위진수당 시대의 호한의 충돌과 융합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그 전에 중세 왕조의 변천사를 봅시다. 한나라에서 위, 촉, 오 그리고 서진 후에 북조, 남조, 수, 당 순서입니다. 먼저 특징으로는 귀족제의 시대였습니다. 문벌귀족제가 성립되었고 위나라의 구품관인법(구품중정제) 관리 등용 제도가 있었습니다. 지역 여론(향론)에 따라 인재를 등급화(향품)하여 관직에 등용했고 향론을 지역 호족이 장악하면서 호족이 중앙 귀족화 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이후 가문이 등급화/고정화 되면서 문벌귀족사회가 성립되었습니다. 진 왕조의 성립부터 동진 정권 성립까지 귀족들이 주도하였습니다. 이 때는 황제권이 귀족권보다 낮았습니다. 귀족 문화도 발전하였습니다. 사상, 문학, 예술이 유행했고 족보가 발전했습니다. 특권은 신분 세습, 부역 면제, 형벌 감면이 있었지만 이것으로 인해 점차 무능력화 됐습니다. 결국 귀족 사회는 붕괴하게 됩니다. 후경의 난과 수의 통일 과정에서 다수 문벌가문이 몰락했고 수당의 삼성육부제가 결정적 역할을 했습니다. 삼성육부제에는 황제와 함께 정책을 논의, 결정하는 중서성, 정책 심의 간언 관리 감찰, 봉박을 하는 문하성, 육부로 구성되어 정책 집행, 보고를 하는 상서성입니다. 이것으로 인해 합리적 정책 결정이 가능했고 심의 ,집행, 황제권과 귀족권의 타협도 가능했습니다. 그리고 과거제를 실시하였고 율령을 정비했습니다. 측천무후 시기 이후 구귀족이 몰락하고 과거 관료들이 대두됐습니다. 우이당쟁이 있었는데 이것은 귀족출신과 과거 급제 출신자의 경쟁이었습니다. 당말 혼란기에 결국 잔존 귀족가문은 몰락하게 됩니다. 


 호한의 융합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오호십육국 시대로 한대이래 중국에 들어가 살던 이민족, 흉노, 선비, 갈, 강, 저 ,서진, 팔왕의 난 이후 화북에서 독립 국가를 건설했습니다. 북위는 선비족과 화북 지역을 통일했고 한인귀족의 협력이 있었습니다. 최호의 국사 사건도 있었습ㄴ다. 선비족 선조의 역사 편찬에서 일부 비판적인 내용이 있었고 황제는 급기야 분노하게 됩니다. 그래서 최호를 비롯해 고위 귀족을 척결했고 이로 인해 황제권이 귀족권보다 앞서게 됩니다. 효문제의 한화정책도 있었습니다. 호한의 융합에 일조했습니다. 낙양으로 천도헀고 호한의 결혼을 장려했고 호성을 한성으로 고쳤습니다(성족분정) 호족의 한인귀족제를 인정했고 그 속에서 호한간의 융합을 의도 했습니다. 이후 한화된 선비 귀족과 비한화 선비간의 분열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동위와 서위의 분열 원인입니다. 북위에서 수당은 균전제, 조용조, 부병제가 있었습니다. 당 중기까지 계승되었습니다. 균전제는 백성들에게 토지 분배, 곡물/비단/마 등을 생산하는 것입니다. 조용조는 토지세, 노역, 인두세를 납부하는 것이고 부병제는 성인남성은 지정된 부에 소속되어 병역 혹은 군사훈련을 받는 것이었습니다. 호한체제는 북방 유목민족과 남방 농경민족이 서로 잡거하면서 출동과 융합을 해 나가는 것입니다. 도성도 건설했고 황제의 친정, 구휼 정책 그리고 대외무역과 수공업을 중시했고 대외개방을 했습니다. 수당대 국제적 문화의 성립 배경입니다. 수당세계제국은 동아시아 문화권의 형성 기간이었습니다. 국제적이고 개방적인 문화로 실크로드 무역, 광주에 시박사가 있었고 당삼채와 호인용, 유리가 생겨났습니다. 신라나 일본이나 베트남에 유학생이나 승려가 왔었고 조로아스터교, 명교, 이슬람교, 네스토리우스교와 같이 외국 종교도 유행했습니다. 조공책봉체제와 동아시아 문화권의 형성도 이 때입니다. 중화의 책봉과 오랑캐의 조공을 매개로 이루어진 형식적인 정치적 신속 관계가 조공책봉체제입니다. 중화는 변경 방비와 중화사상 관철을 통한 통치 정당성을 확립했고 오랑캐는 경제, 문화 교류가 목적이었고 중국의 권위를 빌려 주변에 대한 정치적 우세 과시가 목적이었습니다. 이에 기반하여 정경 교류가 활발했고 한자, 유교, 불교, 율령체제를 퍼뜨릴 수 있었습니다.  


 중국의 불교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그 전에 인도 불교의 발전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원시불교와 근본불교는 싯다르타 및 그 제자들 시기의 불교를 가리킵니다. 부파불교는 석가모니의 사후 00여년이 지나 교리와 계율의 해석을 놓고 20여개 부파로 분열된 것을 말합니다. 출가를 전제로 자기수행의 완성을 중시했고 아라한은 부파불교에서 수행을 통해 깨달은 자를 일컫습니다. 대승불교는 출가자 중심의 이론적인 기존 불교를 비판했고 모든 중생이 부처가 될 가능성이 있는 보살이라고 봤습니다. 이타행과 염불을 통해서도 성불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보살은 대승불교에서 뛰어난 불교 수행자를 가리킵니다. 민간신앙과 결합하여 붓다의 신격화가 일어났고 이는 불교의 중앙아시아, 중국 전래 이후 더 심화 됐습니다. 중국 불교는 실크로드를 통해 전한말기에 전래 됐고 이 때 소승과 대승이 함께 전래 됐습니다. 유학이 사회적 혼란과 권위의 붕괴, 죽음과 내세에 대한 해답이 부재한 상황과 주술저 기능, 인도 의학과 천문학이 겹쳐 불교가 확산 되었습니다. 격의불교는 외래 사상인 불교를 중국 전통 노장사상에 맞추어 재해석한 것입니다. 초기엔 석가모니도 신선의 일종으로 인식했습니다. 위경과 의경은 불교에 유교, 도교의 내용이 첨가되어 중국에서 제작되었습니다. 대표작으로는 노자화호경, 부모은중경이 있습니다. 호국불교는 종교와 국가권력의 결합입니다. 호족의 적극적 수용과 통치를 위해 오호간, 호한간 정신적 단결의 매개체입니다. 즉 불교의 평등론을 강조했습니다. 황제즉여래설을 퍼뜨려 국가권력의 불교 통제, 후원과 사찰을 많이 지었고 도첩제와 승관제를 정비했습니다. 종파불교는 수당대에 이르러 중국의 독자적인 불교이해에 기반하여 흥기했던 여러 종파들을 일컫습니다. 인도에서의 힌두교 흥기이후 대승불교의 발전은 중국이 주도했습니다. 대표 종파로는 천태종, 법상종, 화엄종, 밀종, 선종이 있습니다. 하지만 불교계도 타락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면세와 사하촌, 공덕원 그리고 사찰과 불상 건립 등에 국가에서 대규모 재정을 지출했고 연애 경영, 저점, 점포, 차방, 고리대금업과 폐불로 인해 불교계의 타락이 드러나고 점차 힘을 잃어갑니다. 당대 이후의 불교는 국가권력에 결합한 불교종파, 불교교단의 자체 타락 그리고 당이 멸망과 함게 종파도 쇠퇴했습니다. 송대 이후에는 민간 기반의 선종을 중심으로 불교가 통합되었습니다. 유교, 불교, 도교 삼교의 통합 경향은 성리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민간 종교로 저항의 구심점이 도기도 했습니다. 미륵하생 신앙과 청말 백련고의 난 그리고 현재의 파룬궁이 그 증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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